시추 장소~영일만항 5시간 더 가까운데…부산항 점찍듯 낙찰

구연주 기자 / 기사승인 : 2024-08-05 12:3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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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형발전 없는 졸속 처리…유전개발, 포항 홀대 안 된다
사업 시작부터 포항에 불공정…윤석열 대통령 정책과 대치돼
60점 걸린 시추 경험·접근성…항목당 10점씩밖에 못 받아
동해 겨울철 높은 파도 이유…포항 거리상 이점 인정 안 해
석유公 무사안일주의도 한몫
영일만 유전이 성공적으로 개발되면 영일만항이 북극항로의 거점항으로 자리 잡을지 주목된다.

'대왕고래 프로젝트' 연합뉴스 그래픽


경북 포항 앞바다에서 벌어지는 '대왕고래 프로젝트' (동해 심해 유전·가스전 개발 사업) 1차 시추 사업의 배후항만 입찰에서 영일만항이 아닌 부산항이 낙찰되면서 포항 지역사회가 부글부글 끓고 있다.

영일만항의 항만 경쟁력이 부산항에 비해 약한 것은 사실이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그게 다가 아니다.

대왕고래 프로젝트 지역에서 가장 가까운 영일만항이 처음부터 완전히 배제된 채 부산항을 점찍은 듯한 입찰 공고가 났고, 당연한 결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지난 6월 대왕고래 프로젝트 정부 발표 당시 윤석열 대통령이 '영일만 유전'이라는 표현까지 썼음에도 이 같은 결과가 났다는 건 이번 입찰을 진행한 정부 부처와 관계 기관이 국토균형 발전 차원의 접근은 아예 고려하지 않고, 단순 셈법으로만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다행히 앞으로 시추 작업이 여러차례 또 이어지는 만큼 이번 상황을 제대로 분석해 다음에는 반드시 포항 영일만항이 입찰을 따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겨울 파도가 높고, 시추 경험이 없어 안된다고?

포항시 등에 따르면 지난달 말 진행된 대왕고래 프로젝트 배후 항만 입찰 자체에 불공정한 부분이 있었다.

한국석유공사 측은 입찰 공고를 내면서 여러 조건들을 걸고 70점 이상이 되면 입찰에 참여가 가능하도록 했다.

조건 중 ▷시추 경험 ▷접근성에 각각 30점씩 60점에 걸려 있는데, 포항 영일만항은 여기서 각 항목당 10점씩밖에 받지 못했다. 다른 조건에서 다 만점을 받아도 70점을 넘기지 못해 아예 참가 자격도 얻지 못하는 입찰이었다. 반대로 부산항은 시추경험, 접근성 모두 만점 요건을 갖춰 입찰에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포항시는 시추선 운용의 경우 어차피 로드맵을 따라 진행하는 것이고, 접근성은 부산항(시추 장소까지 9시간)보다 영일만항이 5시간이나 더 가깝다는 점을 강조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석유공사 측은 겨울철 높은 파도로 시추선과 항만을 오가는 보급선의 접안이 어렵다는 이유로 영일만항의 거리상 이점도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포항시는 불공정 입찰이라고 주장하며 강하게 항의했지만 끝내 입찰은 그대로 진행됐다.

포항시 관계자는 "12월에서 1월 시추 사업이 진행된다고 하면 동해의 기상은 육지나 바다 똑같이 악천후이고, 사업 추진을 겨울이 아닌 다른 계절에 해도 될 일"이라며 "시추 경험에 대한 조건도 말이 안 된다. 애초 영일만항을 원천적으로 배제하는 형태로 입찰이 진행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석유공사는 국가계약법에 따라 진행하다 보니 불가피한 면이 있다고 했지만 누가 봐도 부산항을 염두에 둔 입찰"이라고 거듭 지적했다.

◆대통령 말도, 국토균형 발전도 전혀 고려되지 않아

애초 대왕고래 프로젝트를 발표한 윤석열 대통령은 '영일만 유전'이라는 점을 밝히면서 사업의 구체적 내용을 알렸다. 이 발표 이후 당연히 사업이 진행될 항만은 포항 영일만항이 유력할 것이라고 포항시민들은 내다봤다.

영일만항이 국제컨테이너항인 점과 항만 배후단지가 조성돼 있는 점 등에서 유전 산업이 진행되면 항만 발전과 더불어 지역 발전을 견인할 수 있다는 기대를 모았다.

특히 윤 대통령이 지방시대를 강조하며 국토균형발전을 꾀하고 있는 시점에 들린 소식이어서 포항은 물론 대구경북과 인근 광역 지자체의 관심이 어느 때보다 높았다.

그럼에도 석유공사 측은 이 사업이 가진 여러 의미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불공정한 입찰을 내세워 이미 포화 상태인 부산항을 영일만 유전 개발 배후 항만으로 낙찰했다.

석유공사 측이 이런 결정을 내린 배경에는 '무사안일주의'도 깔려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석유공사 측에 여러 차례 불공정 입찰을 항의했던 한 포항시 공무원은 "석유 공사 관계자들은 원칙적으로, 법적으로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내부 감사를 받을 일을 만들지 않겠다'는 입장도 내비쳤다"며 "그저 귀찮은 일을 만들기 싫어 이 사안에 대해 정책적인 고려를 전혀 하지 않았다는 말이라 너무 황당했다"고 털어놨다.

이어 "이런 셈법이라면 대형 도시는 갈수록 커지고 지방 도시는 소멸의 길을 걷게 돼 윤 대통령이 강조한 국토균형 발전 정책과도 척을 지게 된다"며 "이번 입찰은 되돌릴 수 없다고 해도 2차부터는 정책적 판단도 고려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부족한 영일만항 인프라 분석·보강해야

이와 동시에 부족한 영일만항 인프라도 시급히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우선은 영일만항이 부산항을 보조하는 지원 항만 작업을 수행하며 관련 산업의 덩치를 키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예를 들어 시추 현장에 당장 투입하기 어려운 자재들을 임시 야적하거나 선박 수리, 사고 등 긴급 상황에 대비한 출동센터, 에너지 급유시설 등은 영일만항을 활용하자는 것이다.

포항이 가진 풍부한 제철 인프라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탐사 시추 산업에서 아직 초보 단계인 한국은 관련 기술의 노하우나 특허 등이 해외 국가에 비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세계 최고 수준인 포항의 제철 기술을 활용한다면 전문 강관 등 관련 장비의 국내화를 준비할 수 있다. 여기에 시추된 시료를 분석하는 R&D(연구개발) 산업 또한 포항이 가진 강점 중 하나이다. 포항에는 국내 유일의 4세대 방사광가속기와 포스텍, 한동대 등 우수한 연구 인프라가 가득하다.

이를 통해 영일만항의 부족한 면들을 채우고 즉시 시추선 운용이 가능한 항만으로 성장하게 되면 이후 진행될 배후 항만 입찰에서는 사업을 낙찰받을 확률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포항의 한 에너지업계 관계자는 "석유·가스 탐사 시추는 국내 어느 곳에서도 제대로 시행한 적 없는 시작 단계의 산업이다. 경제성 있는 지하자원이 나온다면 좋겠지만 그것이 아니더라도 이번 기회에 해외가 가진 관련 노하우를 국내에 축적할 필요가 있다"면서 "이번 기회를 마중물로 삼아 제철·R&D·탐사 산업 전반의 능력을 향상해 향후 북극항로에 대비한 영일만항의 동반 성장을 꾀해야 한다"고 했다.

정부 발표에 따르면 이번 대왕고래 프로젝트 탐사·시추는 올해 12월부터 약 4개월간 1천여억원을 투자해 7개 유망구조 중 1곳에서 진행한다. 앞으로 최소 5년간은 추가 유망구조에 대한 탐사 시추가 이어질 전망이다.

이번 배후 항만 입찰은 12월부터 진행되는 1차 사업을 위한 것이며, 약 12억원가량의 예산이 든다.

에너지업계에 따르면 이러한 배후 항만 사업은 강관·선박수리·긴급출동·자재 야적장 등 세부 항목으로 나눠 수차례 더 이어질 것으로 관측된다.

정확한 탐사 시추 장소는 비공개이지만, 유망구조가 위치한 6~8광구에서 포항 영일만항까지는 약 90㎞, 부산항은 120여㎞ 거리다.

업계 관계자는 "현재 1차 입찰에서 부산항이 낙찰되며 주요 항만의 역할을 가져갔지만, 포항 영일만항이 가진 거리적 이점을 생각했을 때 계속되는 2차, 3차 사업에서 아직 충분한 승산이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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